진리와 화두선의 언어 레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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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화두선의 언어
진리에 대하여 설명한 글입니다. 진리와화두선의언어
1. 진리, 앎
2. 무(無) 혹은 공(空) - 실재와 관련하여
(1)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그리고 공(空)
(2) 언어와 침묵
3. 화두
(1) 전복의 기술
(2) 또 다른 언어
4. 깨달음, 방편
1. 진리, 앎
철학이나 종교란 어쩌면 ‘진리’라는 것, 혹은 진리라는 말을 찾아 헤맨 이들의 발자취의 기록일 것이다. 이때 과연 그 ‘진리’란 무엇인가, 그 ‘진리’란 것 안에 담기는 내용이 무엇인가의 문제 이전에 ‘진리’라는 말 자체의 함의를 따져보아야겠다. 흔한 정의로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을 의미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힐쉬베르거는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진리란 판단과 판단이 재현(再現)하려는 사태가 내용적으로 일치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때 힐쉬베르거가 말하는 진리란 플라톤의 진리관을 설명하기 이전에 전제하는 것으로 재현, 즉 ‘진술되는’ 진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데서 대응론적 언어관에 입각한 진리관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것은 얼핏 불교가 표방하는 진리란 것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처럼, 혹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미 전제부터 글러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판단과 판단이 재현하려는 사태의 일치로서의 진리란 폭넓게 해석하였을 때, 제반 현상에 대한 정확한 통찰을 의미할 것이며, 이때 통찰이란, 판단이라는 어떤 개별적 주체의 주관적 인식이 그 자신만의 주관성을 넘어, 현상에 대한 보편적이고 객관적 앎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 이러한 통찰, ‘앎’은 단순한 지적 이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이라는 사건으로, 더불어 이 인식의 전환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 혹은 실존 차원의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일 테다. 그것은 진리란 것이 개별적 주체(혹은 주관적 인식)의 보편적 앎을 꾀하는 것일 때,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식적 전환이 일어나는 장소, 그것은 곧 실존적 전환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이 장소는 개별적 주체의 주관성이라는 인간 조건, 혹은 한계가 그를 초월한 보편적 앎의 차원으로 연결지어지는 장소이다.
이러한 ‘앎’이 불교의 ‘깨달음’이다. 불교는 그러한 앎의 체득, 인식적, 존재적 전환을 수행을 통해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실천한다는 데서 철학인 동시에 종교이다. 오히려 불교의 초점은 이 지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상대성을 넘어서는 절대적 인식이라는 것의 구체적 내용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외려 그조차도 상대적인 인식은 아닌가. 보편적 인식, 불교적 용어로 ‘깨달음’이란 역시 또 다른 주관성, 자기 오인(誤認)이 아니겠는가 궁금증이 생긴다. 그러나 이때 선사들은 아마도 말로 따져볼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을 해보라고 말할 것이다.
자료출처 : http://www.ALLReport.co.kr/search/Detail.asp?pk=16120570&sid=sanghyun7776&key=
[문서정보]
문서분량 : 9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진리와 화두선의 언어
파일이름 : 진리와 화두선의 언어.hwp
키워드 : 진리와,화두선의,언어
자료No(pk) : 16120570
진리와 화두선의 언어
진리에 대하여 설명한 글입니다. 진리와화두선의언어
1. 진리, 앎
2. 무(無) 혹은 공(空) - 실재와 관련하여
(1)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그리고 공(空)
(2) 언어와 침묵
3. 화두
(1) 전복의 기술
(2) 또 다른 언어
4. 깨달음, 방편
1. 진리, 앎
철학이나 종교란 어쩌면 ‘진리’라는 것, 혹은 진리라는 말을 찾아 헤맨 이들의 발자취의 기록일 것이다. 이때 과연 그 ‘진리’란 무엇인가, 그 ‘진리’란 것 안에 담기는 내용이 무엇인가의 문제 이전에 ‘진리’라는 말 자체의 함의를 따져보아야겠다. 흔한 정의로 진리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을 의미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힐쉬베르거는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진리란 판단과 판단이 재현(再現)하려는 사태가 내용적으로 일치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때 힐쉬베르거가 말하는 진리란 플라톤의 진리관을 설명하기 이전에 전제하는 것으로 재현, 즉 ‘진술되는’ 진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데서 대응론적 언어관에 입각한 진리관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것은 얼핏 불교가 표방하는 진리란 것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처럼, 혹은 불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미 전제부터 글러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판단과 판단이 재현하려는 사태의 일치로서의 진리란 폭넓게 해석하였을 때, 제반 현상에 대한 정확한 통찰을 의미할 것이며, 이때 통찰이란, 판단이라는 어떤 개별적 주체의 주관적 인식이 그 자신만의 주관성을 넘어, 현상에 대한 보편적이고 객관적 앎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 이러한 통찰, ‘앎’은 단순한 지적 이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이라는 사건으로, 더불어 이 인식의 전환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 혹은 실존 차원의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일 테다. 그것은 진리란 것이 개별적 주체(혹은 주관적 인식)의 보편적 앎을 꾀하는 것일 때,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식적 전환이 일어나는 장소, 그것은 곧 실존적 전환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이 장소는 개별적 주체의 주관성이라는 인간 조건, 혹은 한계가 그를 초월한 보편적 앎의 차원으로 연결지어지는 장소이다.
이러한 ‘앎’이 불교의 ‘깨달음’이다. 불교는 그러한 앎의 체득, 인식적, 존재적 전환을 수행을 통해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실천한다는 데서 철학인 동시에 종교이다. 오히려 불교의 초점은 이 지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상대성을 넘어서는 절대적 인식이라는 것의 구체적 내용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외려 그조차도 상대적인 인식은 아닌가. 보편적 인식, 불교적 용어로 ‘깨달음’이란 역시 또 다른 주관성, 자기 오인(誤認)이 아니겠는가 궁금증이 생긴다. 그러나 이때 선사들은 아마도 말로 따져볼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을 해보라고 말할 것이다.
자료출처 : http://www.ALLReport.co.kr/search/Detail.asp?pk=16120570&sid=sanghyun7776&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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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분량 : 9 Page
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진리와 화두선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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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 진리와,화두선의,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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